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이자료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호남인물 100" 84∼86쪽(남성숙 지음)에서 따온 글입니다.

 

지식인은 민중편에 서야 한다.

 

1527년 광주시 광산 출생

1558년 사마시 을과 급제

승정원 주서,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사성 등 역임

1527년 고부에서 객사

저서:고봉집 15책, 논사록, 왕복서간집 등

 

   조성 중종 시절 경상도에 퇴계 이황이 있었다면 전라도에 고봉 기대승이 있었다. 그때 살았던 선비 중 어떤 사람도 고봉 기대승이 퇴계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퇴계는 고봉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고봉이 자신보다 학덕이 높음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호남의 고봉은 영남의 퇴계에 비견할 수 없을만큼 초라하게 자리매김 되어있다.

   중종 22년 동짓날 열여드렛날 광산구 임곡동에서 고봉은 태어났다. 퇴계가 26살 되던 해이고 율곡이 태어나기 10년 전이다. 고봉의 청년시절 나라는 위태위태했다. 연산군의 폭정이 막 끝나고 중종이 집권하자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가 약관의 나이로 나라를 새롭게 바꾸려던 시기다. 그러나 조광조는 반대파의 모략에 쫒겨 희생되고 만다. 이른바 기묘사화다. 이때 조광조와 같이 희생된 사람 중에 기준이라는 사람이 있다. 기준을 잃은 기씨 일가가 남으로 나와 터를 잡은 곳이 광산구 임곡이고 바로 기대승의 조상이다.

   고봉은 열심히 글을 읽어 32세에 과거에 응시해 문과의 을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 부정자가 된다. 여기서 고봉은 퇴계를 만난다. 이때 고봉은 첫 질문으로 '바른 선비의 처세'를 물었다. 퇴계는 '자신을 깨끗이 하고 옳은 일만 하면 된다'고 답하면서 둘의 우정이 싹터 26년간 계속 됐다.

   고봉은 임금 곁에서 늘 조선 건국 이래 앓아온 내부 모순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고봉의 비판의식, 대쪽같은 성품은 그를 결국 외롭게 만든다. 고봉은 44세에 관직을 버리고 임곡에 서재를 짓고 내려올 결심을 한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말렸다. 고봉은 옷자락을 잡는 선조에게 이 말을 남겼다.

   "군왕이 정사를 소홀히 한다든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근본이 없는 겁니다. 마음을 함부로 쓰고 백성이 고루고루 살도록 하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그 왕의 혜택이 밑까지 이르게 못하게 됩니다.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 나라는 잘 다스려지는 것이며 백성이 만족하게 되면 군주는 누구와 더불어 부족함이 있으리까."

   고봉은 짐을 챙겨 한양을 떠났다. 천안에 도착하자 볼기에 종기가 나기 시작했다. 살을 베는 아픔을 참고 태인에 도착했다. 선조가 병 소식을 듣고 약을 지어 보냈으나 약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객사하고 말았다. 선조는 모든 장례 비용을 보내 임곡동 너부실에 안치하도록 했다.

   평생 의리와 강구를 본분으로 삼은 대선비, 자신의 장례를 치러준 임금에게 고집불통 신하였지만 임금을 대하기만 하면 이 말을 되풀이 하는 깐간한 관리였다.

   "국가의 안위를 항상 옳음에 두십시오. 현명한 임금은 시비를 잘 식별하여 올바른 대신을 등용합니다."

   선조는 이러한 엄격한 신하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그가 경연에서 진계한 것을 모두 상고하여 등사해내 임금의 예람에 대비 했다. 그 책이 유명한 <논사록>이다. 정치·경제·사회·논리 부정한 학설을 막고 인심을 바로 잡으려는 도가 모두 이 책에 담겨 있다. 읽는 자는 침잠하고 반복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고, 밝게 분별해서 참을 쌓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고봉이 <논사록>에서 사림파 학자들의 최고 이상이었던 덕치주의의 실현을 위해 강조한 것은 군주의 조건이었다. 말하자면 군왕이기 이전에 인격을 갖춘 인간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이라 할지라도 인격을 닦기 위해서는 치심(治心)과 수신(修身)을 학문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먼저 자기를 다스리고 난 후 군주의 통치기준을 백성, 즉 민중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릇 정치는 민중을 위하려는 민본위민(民本爲民) 정치여야 한다는 애기다. 인심의 소재가 천명이라는 맹자의 사상을 말뚝박은 것이다.

   위와 아래가 통하지 않은 시대를 살다간 고봉 기대승. 그의 고민과 외침의 결정체는 민중이고 민중이 고루 잘 사는 복지사회 구현이었다.

 

 

<가볼만한 곳>

탯자리: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

광주시 광산구 광곡동 빙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