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상하이  천안문 광장에서-동료교사들과 함께

 

베이징의구내성지역

 

◆천안문광장

   천안문 광장은 베이징의 중심이다. 청나라 때까지만 해도 여기에 없었다. 청나라 앞 대로인 장안대가도 없었다. 이것들이 생긴 것은 1959년의 일로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정비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11만 정도였다. 그때의 정비로 넓이가 40만로 확대되어 50만 명 정도의 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천안문을 북쪽으로 바라보는 천안문 광장은 무엇보다도 그 넓이에 압도되지만, 또 하나의 색다른 명물은 국기를 게양하고 내리는 과정이다. 그 시간에 가까워지면 국기 게양을 구경하려고 게양대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특히 지방에서 베이징을 구경하려고 방문한 중국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리고 국경일이라든지 메이데이에는 천안문과 그 사방의 건물 지붕은 조명으로 장식되어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도 있다.

 

◆천안문

   천안문은 명나라 영락 15년(1417)에 건설되었다. 지어질 당시에는 승천문 이라고 불렸는데, 전화로 소실되어 1651년에 재건되었다. 천안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때부터이다.

   고궁의 남문에 해당하며, 지붕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기단에는 5개의 통로가 있고, 황제는 중앙의 문으로 출입하였다. 명·청나라 때에는 황제의 칙서를 발하는 의식이 이 천안문에서 행해지기도 하였다. 문 앞에 있는 5개의 백대리석 다리는 금수교라고 하는데 조각이 아름답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선언이 이곳에서 이루어져 중국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장소이다.

 

천안문사건

   천안문 광장에서 오래되지 않은 때에 두 개의 중요한 천안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문화대혁명이 끝나던 해인 1976년 4월 5일 일어난 것이다. 발단은 그 해 1월에 서거한 저우언라이를 추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인데서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주위에 화환을 던지며 마오쩌둥과 장칭 등 소위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세력들에 대한 비난과 반대의 소리를 높인 것이었다. 이것이 약 3,000여 명이 사망·부상·체포당하는 사태가 된 하나의 천안문 사건이었다. 또 하나는 1989년 6월 4일에 일어난 것이다. 전차에 맨손으로 대항하는 청년들과 비무장한 사람들, 그리고 이들에게 발포하는 인민해방군의 위태로운 대치 상황으로 묘사되는 이 사건은 민주를 바라는 학생들의 움직임이었다. 그 뒤, 세계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나 구소련의 공산당 독재가 점차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인민영웅기념비

   천안문 광장 남쪽에 우뚝 솟은 첨탑이 바로 이 기념비이다. 높이 약 38m로,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명·무명의 전사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1958년 5월 1일의 메이데이에 낙성하였다.

   비의 하단에는 높이 2m의 대형 부조 10매가 끼워져 있고, 최근 100년에 걸친 혁명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정면에는 마오쩌둥의 글씨로 '인민영웅영수불후(인민영웅은 영원히 불멸이다.)'는 금문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뒷면에는 저우언라이가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제단에 있는 총탄의 흔적은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사건 때 생긴 것이다.

 

◆고궁박물원

   명·청조의 황제가 살았던 성이 그대로 고궁박물원으로 되었다. 고궁이란 원래의 궁성 즉 자금성을 말한다. 동서로 750m, 남북으로 960, 면적은 72만, 방수는 약 9,000개가 넘는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복궁과 같은데 중국의 국토 크기에 걸맞는 엄청난 넓이이다.

   남쪽 끝의 천안문에서 북쪽 끝의 신무문까지 일직선으로 전삼전과 후삼궁 이있다. 전삼전은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을 가리킨다. 이 구역에서는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이 행해지는데, 이 일대를 외조라고 불렀다.

   후삼궁은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등을 가리키는데, 황제는 여기서 정무를 보거나 황후나 궁녀들과 일상생활을 보냈다. 이 일대는 내정이라고 불렀다.

   고궁의 입구인 오문은 높이가 37.95m, 벽의 두께는 36m나 되는 크기이다. 그 앞 광장은 형장이기도 하여, 옛날부터 여기서는 채찍질형이 집행되었다. 오문을 들어서면 그곳이 고궁의 외조이다. 눈앞의 대리석으로 된 내금수교를 건너면 태화문이 있고, 태화문을 나서면 그 전방에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이 바라다 보인다.

 

◆태화전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명·청조를 통하여 몇번이나 소실과 재건을 되풀이하였다. 현재의 것은 강희제 시대(1695년)에 세워졌고, 그 후 여러 차례의 대수리가 이루어졌다.

   태화전은 즉위식, 원정 출수 의식, 원단의 경축, 탄생일 축전, 동지의전 등이 행해졌던 장소이다. 중앙의 약간 안쪽에 장엄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보좌(황제의 자리)가 놓여있다. 태화전은 백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삼층의 기단 위에 세워진 것으로 그 전면의 기단 사이에 많은 동제의 향로가 보인다. 여기서 의식이 행해질 때마다 이 향로에서는 향이 피워졌다고 한다. 그 자줏빛 연기가 떠도는 곳에 자리잡은 황제는 그야말로 '구름속의 존재'라는 이미지를 갖고 군림하였을 것이다.

   3층의 기단 위에는 남쪽에서 보아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의 순서로 나란히 서 있다. 이 3개의 궁전은 삼대전이라 불리고 있다.

 

베이징 구외성<構外城>지역

 

천단공원天壇公團<텐탄궁위위안>

   명·청조를 통하여 황제가 오곡풍양  (五穀豊穰)을 하늘의 신에 기도한 곳이다.

   명의 영락제 때에 세워졌고, 그 후에 청의 건륭황제 때에 개축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고궁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에 일당(日壇), 월단(月壇), 천단(天壇), 지단(地壇)이 대칭 위치에 있다. 각각의 신이 모셔져 있고, 천단에는 하늘의 신이 모셔져 있다. 현재는 주위 6km에 달하는 공원으로 넓이는 고궁의 약 3배에 달한다. 북에서 남으로 기년전, 황궁우, 원구 등의 주요한 건물이 직선에 나란히 서있다.

 

원구단(圓丘壇)

   바깥쪽은 4각, 안쪽은 둥근 2중의 담으로 둘러싸인 3층의 원형 대리석 단을 말한다. 공원 남천문(南天門) 입구 근처에 있다. 이곳은 황제가 하늘에 기도하는 곳이다. 매년 동지에 재궁에서 수신재계한 황제가 여기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데, 여름의 기우제도여기서 행하여졌다.

   원구단에 올라서면 멀리 황궁우의 푸른 지붕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원구단의 한가운데에는 황제가 기도를 올리는 원심(圓心)이라는 둥근 대리석 판이 있는데, 그곳에 서서 소리를 지르면 자기의 귀에만 크게 반향음이 되돌아 오는 음향현상이 있다.

 

황궁우(皇穹宇)

   역대황제의 위패를 모셔 둔 곳이다. 명의 가정(嘉靖)황제 시대에 세워지고, 그 후 청의 건륭황제 시대에 재건되었다. 이곳은 회음벽(回音壁)과 삼음석(三音石)이 유명하다, 회음벽은  황궁우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담으로 속이 비어 있다. 그래서 담을 향하여 소리를 내면 반대쪽의 담에 선 사람에게 들린다고 한다. 벽에는 시험해 보려는 듯 귀를 담벽에 대고 있는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삼음석은 황궁우 앞의 상석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 역시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상석은 여러 개가 나란히 서있지만, 북쪽에서 세 번째까지를 삼음석이라고 한다. 이곳이 붐비는 이유는 돌 위에서 한 번 손뼉을 치면 천 번째의 돌에서는 1회 두 번째에서는 2회, 세 번째에서는 3회 반향음이 되돌아온다고 하여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이 시험해 보려고 해서 몰리기 때문이다.

 

기년전(祈年殿)

   3층의 원형 기단 위에 우산을 편 듯한 3층 지붕인 원형 건물이다. 높이 38m, 직경30m이다. 이곳에서 황제가 오곡 풍년의 제례를 행하였다.

   기년전의 3층 지붕 기와는 유약을 칠한 유리기와라고 불리는 것인데, 여기의 기와 빛깔은 검정이 섞인 듯한 푸른빛이 쪽빛보다도 더 푸르다. 기년전의 지붕은 멀리서도 그 빛깔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눈에 띈다.

   이 건물은 대들보나 마룻대를 사용하지 않은 중국의 독특한 건축방법이 쓰였다. 기년전 건물 바로 밖으로 붉은 색의 뚜껑을 가진 기둥이 있고, 그 주위에 12개씩의 원주가 2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4개의 기둥에는 꽃무늬가 그려져 있어 4계절을 나타내고 있다. 안쪽의 12개는 1년의 12개월, 바깥쪽의 것은 12간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내외합계 24개의 지붕기둥은 24절기를 나타내고 있다. 기년전의 유리기와가 현재의 빛깔이 된 것은 청의 건륭황제 시대이고, 그 이전에는 위에서부터 파랑, 노랑, 자주의 3가지 빛깔이었다. 기년전은 천안문과 함께 베이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심벌이다.

 

상하이의 여행 계획

   상하이는 베이징 만큼이나 중국에서 손꼽을 만한 도시로 꽤 거대하지만, 베이징에 비길만한 관광 명소는 없다. 주로 상업도시로 외국인 회사가 많이 들어와 있고, 인구가 조밀한 반면에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 좁은 곳이 많다. 이런 도로 사정으로 인하여 출·퇴근 등의 러시아워에는 정체가 많은 편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남경로, 이국풍의 거리인 외탄과 그 옆의 황푸 공원,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와 루쉰 공원 등이 있고 그 외에 예원, 옥불사, 용화사가 있다. 대개는 여행의 경유지로 많이 들르는 상하이는 1~2일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혹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주변의 소도시를 돌아볼 계획이어도 5일 정도면 충분하다.

 

상하이의 관광명소

루쉰공원

   상하이시 북쪽에 위치한 이 공원은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는 루쉰을 기념한 곳으로 일명 홍구공원(虹口公原)이라고도 한다. 원내에는 루쉰의 묘와 루쉰의 기념관이 있고, 공원 옆에는 루쉰이 말년을 보낸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공원 안 루쉰 묘 옆에 있는 루쉰 기념관에는 루쉰의 친필 원고와 애용품이 전시되어있다. 술로 유명한 루쉰의 고향인 사오싱의 민간주택을 모방한 건물로 지붕의 검은 기와와 흰 벽의 대조가 아름답다. 그리고 루쉰 묘의 묘비명은 마오쩌둥의 필체이다.

   그 외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윤봉길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의미 깊게 기억되는 것이다. 현재는 폭탄 투척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한국인이라면 상하이에서 찾아가 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다. 현재 루쉬 공원 내 한 곳에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정자를 조성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

   일제시대 3·1운동이 일어난 후 광복을 위해 임시로 중국 상하이에 선포한 정부가 활동하던 장소이다.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사건으로 일본의 탄압이 심해져 1932년 저장성의 항저우로 활동지를 옮기기 전까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다고 한다. 그 당시 쫓기며 활동하던 그들이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꾸며진 이곳이 그들이 활동한 바로 그 곳인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유적지로 조성된 곳은 1992년 노태우 전대통령이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삼성그룹의 노력으로 된 것이다. 각 층마다 당시 활동하던 때의 모습을 추적하여 꾸며 놓았으며 관련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 관광객 외에는 찾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관광객이 없을 때에는 자물쇠를 채워 놓고 있다. 관람할 때는 비닐 덧신을 신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조잡하나마 기념 스카프와 배지도 준다.